김포반도 군자금확보 및 서울 대진공작전 요충지
김포반도 군자금확보 및 서울 대진공작전 요충지
  • 조충민 기자
  • 승인 2019.11.13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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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 3년 전 경기 서북부 의병운동 중심축 김포[1]

지난 1910년 한일합병 전 3년 간 전개된 경기 서북부 지역 의병운동의 중심축이 김포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같은 사실은 김포시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와 재령이씨 문헌공파 김포종친회가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에서 ‘애국지사 이종근 항일의병의 삶과 김포의 정체성과 과제’를 주제로 지난 7일 공동 개최한 학술심포지엄에서 이회수(더불어민주당 정책위 부의장, 사진) 김포새희망포럼 대표의 주제 발표를 통해 밝혀졌다. 본보는 이에 김포의 정체성을 재정립하자는 취지에서 의병 이종근 선생의 삶을 중심으로 4회에 걸쳐 당시 의병운동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편집자>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촉발된 정미의병 시기인 1907년부터 1909년까지 3년 간 강화도 진위대 봉기를 계기로 김포, 파주, 개경 등 서북부를 축으로 경기의병운동이 확산됐다.

유명규(통진), 연기우(김포반도), 지홍윤(황해도) 등이 중심이 된 강화도 진위대 봉기 이후 김포 출신 유명규가 일제 헌병에 붙잡혀 총살당하면서 김포지역민들이 대거 의병부대에 참여하게 됐다.

강화도 봉기가 진압 당한 후 김포, 파주, 적성, 양주, 개경, 풍덕은 경기도 서북부 의병전쟁의 주무대로 자리를 잡았다. 경기도 서북부는 산악지대로서 거점역할을 하고 평야지대인 김포반도는 군자금을 확보하고 서울 대진공 작전의 요충지로서 유격전이 펼쳐지는 장소가 됐던 것이다.

허위(총대장), 이은찬(중군장-원주), 윤인순(우군장-양주) 정용대(좌군장-적성) 의병부대와 경기 동부지역의 김봉기, 박래봉 의병부대 등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서북부 임진강 의병연합으로 한강하구와 임진강 일대 의병부대 간 연합이 이뤄졌다.

김포의병운동은 정용대 의병부대에 속했던 신관수, 이종근, 강상봉이 중심 인물이고 김봉기 의병부대 소속의 조근봉, 박래봉 의병부대 소속의 김경운 등이 참여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김포시가 통합되기 전 행정구역인 통진군, 김포군 전역은 항일의병 무대였으며 군자금 조달과 적의 동향파악으로 서울 진공작전을 엄호하는 역할을 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다.

1908년 1월 서울 대진격 실패 후 같은 해 4월 2차 진격을 준비했다. 정용대 부대는 통진, 교하, 풍덕, 부평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정용대는 군자금 조달과 조직운영의 최고 전략가로 활동하다가 결국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졌다.

1907년부터 3년 간 전국적으로 15만명이 봉기하고 이 중 전사자 1만 6천명, 부상자 3만7천명에 이르렀다.

3년간 김포지역 의병활동에 참여한 수는 연인원 1700여명이고 60회에 걸쳐 교전하며 공격을 단행했고 한강하구와 김포반도에서 유격전 방식으로 전투를 수행하다가 일제의 1909년 경기서북부 및 황해도 지역 의병 대토벌 작전 시 큰 타격을 받고 대부분 은신하거나 만주로 망명하게 됐다.

김포를 중심으로 한 이 같은 격렬한 저항으로 일제의 조선병합을 3년이나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강제 병합 후 조선에 대한 혹독한 탄압과 수탈이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일제는 토지조사를 통해 미등록 토지를 압수했으며 헌병특권과 태형제도로 군사통치를 실시했다. 1914년 행정개편으로 김포군, 통진군, 양천군을 김포시로 통합하고 면장의 80%를 교체하는 등 식민통치체제 구축했다.

또 1914년 김포경찰서 및 읍단위 파출소 설치로 치안을 강화했으며 고율의 소작률 인상 및 일본 자본 진출 등 경제수탈을 통해 민족말살정책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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