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선생, 군자금모집·동향파악…5년 유형 받아
이종근 선생, 군자금모집·동향파악…5년 유형 받아
  • 조충민 기자
  • 승인 2019.11.1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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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 3년 전 경기 서북부 의병운동 중심축 김포[2]
애국지사 이종근 선생 부부 묘.
애국지사 이종근 선생 부부 묘.

지난 1910년 한일합병 전 3년 간 전개된 경기 서북부 지역 의병운동의 중심축이 김포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같은 사실은 ‘애국지사 이종근 항일의병의 삶과 김포의 정체성과 과제’를 주제로 지난 7일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 이회수(더불어민주당 정책위 부의장) 김포새희망포럼 대표의 주제 발표를 통해 밝혀졌다. <편집자>

 

한일합병 전 정용대 의병부대 소속으로 김포의병운동을 주도했던 애국지사 이종근 선생의 공적은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요지에 잘 나타나 있다.

“1908년 4월23일(음력) 경기도 통진에서 의병장 정용대 부대에 참여, 무장한 의병 18명과 함께 대패면 심진사 댁에 가서 양릉면, 산빈면의 동장들을 일제히 모아놓고 1만5000냥의 군자금을 모집하도록 함. 통진군 내 각처에서 군도와 양총, 탄환 등을 수합하고 교하군 민판서로부터도 양총, 탄환, 군도 등을 모집하고 지역 헌병대와 순사의 동향을 파악함”이라고 판결문은 적고 있다.

이종근 선생은 1908년 10월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형(流刑, 죄인을 귀양 보내던 형벌.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장소의 멀고 가까움이나 주거지의 제한 정도에 차등을 둠) 5년을 언도 받고 정배(定配, 죄인을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 정해진 기간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하던 형벌) 생활을 하게 됐다.

계속되는 유형 생활과 정치적 탄압으로 가세가 기울고 17번이나 이사를 다니는 등 극심한 고생을 하다가 강원도 정선에서 병든 상태로 고향에 돌아와 곧바로 1943년 돌아가시고 그 뒤 유족들은 비참한 삶을 살았다.

이종근 선생은 1868년 5월5일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구래리 구지마을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선친에게서 선대 조상의 반외세 애국정신을 배우며 역사의식, 민족의식을 키우게 됐다.

이종근 선생의 배우자 심춘하는 분남학교 설립자 심계택 선생 집안이다. 심계택 선생은 이완용 등 을사5적에 의해 국운이 기울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구래리 구지로 낙향, 1906년 분남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3년 간 김포, 파주, 개경 등 경기 서북부를 축으로 확산됐던 경기의병운동은 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시작된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 표면적으로는 저항의 불씨가 사라진 듯 보였다.

하지만 꺼지지 않았던 저항 정신은 3·1만세항쟁을 통해 다시 한 번 불꽃을 피우게 된다. 강화, 김포, 개경, 파주 등에서 펼쳐진 3·1만세운동이 그 것이다. 특히 김포, 강화지역 3·1만세운동에서 유생, 평민, 농민, 기독교, 천주교, 주민들이 단합하여 거족적인 봉기를 일으키는 배경이 됐다.

한편 이종근 선생 후손들이 1981년부터 이종근 선생의 역사기록을 찾은 결과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아 그 명예를 회복했으며 오라니 3·1만세운동 기념공원에 대한독립군 위령탑을 건립, 이종근 선생의 정신을 기리게 됐다.

또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묘역 정비차원에서 지난 9월 연천 민통선에 있는 이종근 선생 묘역에 애국지사 이종근 독립유공자 공적 표지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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